① 계파
② 요약
③ 이주일씨 별세
④ 이주일씨의 생전활동
⑤ 스타뉴스 [김관명칼럼]
⑥ 내가 만난사람(조영님)
⑦ 이주일의 사진앨범
연일정씨홈페이지 www.yuniljung.com


①계파  [TOP]

延日(迎日,烏川)鄭씨

②요약  [TOP]

▣생몰연도 : 1940.10.24∼2002.8.27
▣이주일(李周逸.)
코미디언 이주일의 본명은 정주일이다. 1940년 10월 24일 강원도 고성군(高城郡) 거진면에서 태어나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원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5년 샛별악극단 사회자로 연예계에 몸담은 뒤, 1979년 텔레비전 방송에 뛰어들면서 희극배우로 이름을 얻기 시작하였다. 이후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등의 유행어로 인기를 끌면서 '코미디의 황제'라는 별칭을 얻었다.
1992년에는 경기도 구리에서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 때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어 교청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1996년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뒤, 같은 해 4월 방송에 복귀하였다.
1982년 연예인축구단 단장, 1988년 한국코미디연구회 창립 회장, 연예인협회 연기분과 명예위원장, 한국 BBS 중앙연맹 부총재 등을 지냈고, 폐암 투병 중이던 2002년 1월부터 금연 명예교사, 범국민금연운동추진위원회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다 같은 해 8월 27일 사망하였다.
대통령 표창(1984), MBC연기대상 최우수상(코미디:1986)을 받았고, 범국민금연운동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영화 출연] 평양 맨발, 얼굴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칼럼집] 뭔가 말되네요(1985), 이주일 평전-삐딱한 광대
[회고록] 인생은 코미디가 아닙니다(사후 출간)
[저서] 뭔가 말 되네요

[학력]
1959 춘천고등학교 졸업
1988 경원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경력]
1965 - 샛별악극단 사회자로 연예계 데뷔
1979 - TBC <전원출발>로 TV데뷔
1982 - 연예인<무궁화축구단> 단장
1985 - 사회복지협의회후원회 회장
1986 - MBC <시민법정>, <명교수명강의>, <일요일 일요일밤에> 등 출연
1986 - 유행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히트
1988 - 연예인협회 연기분과 명예위원장
1988 - 한국BBS중앙연맹 부총재
1992 - 제14대 국회의원(경기구리 국민?민자?신한국)
1992 - 국회 교청위원회 상임위원
1993 - 국민당 탈당
1994 - 국회 문화체육공보위원회 위원
1994 - 민자당 입당

③코미디언 이주일씨 27일 별세[동아닷컴](2002. 8. 27) [TOP]

‘코미디 황제’ 이주일(본명 정주일ㆍ鄭周逸)씨가 27일 오후 폐암으로 입원 치료 중이던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별세해 팬들과 영별(永別)했다. 향년 62세.
강원 고성군 출신인 고인은 오랜 무명 생활 끝에 마흔 살 되던 해인 1980년 TBC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수지 큐’ 음악에 맞춰 우스꽝스럽게 엉덩이를 빼고 뒤뚱뒤뚱 걷는 ‘오리 춤’을 선보이며 일약 국민적인 스타가 됐다. 영화 <평양 맨발>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리빠똥 사장> 등에도 출연했다.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그는 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경기 구리시에서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다. 의정 활동을 마치고 국회를 떠나면서 그는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간다”는 뼈있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998년 4월 SBS ‘이주일의 코미디쇼’를 끝으로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경기 성남시 분당구 농장에서 100여 그루의 소나무를 돌보며 칩거해 왔다. 지난해 11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힘겨운 투병을 하면서도 금연 공익광고를 찍는 등 ‘이주일 신드롬’으로 불릴 정도로 금연 열풍을 몰고 왔다.
소문난 축구광이기도 한 그는 휠체어를 탄 채 5월 31일 월드컵 개막전을 비롯한 한국 축구 대표팀의 경기를 관람하는 등 투병 의지를 불태웠다.
한편 정부는 고인이 금연 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방송 3사는 27일 밤부터 일제히 추모 특집을 방영했다.
유족은 부인 제화자씨와 2녀. 빈소는 국립암센터 영안실 1호에 차려졌으며 장례는 연예예술인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29일로 경기 성남시 장제장에서 화장한 뒤 강원 춘천시 경춘공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각박한 세상에 웃음 안기고
“불가능하다고 여긴 한국의 월드컵 16강 진출이 이제는 가능성 있는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습니까. 축구는 인생과 같습니다. 골문만 보고 달려가다간 금세 우리편을 놓치고 공도 뺏기죠. 가끔씩 옆을 쳐다보면서 백 패스를 할 줄 아는 여유도 있어야 합니다.”
27일 세상을 떠난 고인은 5월31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프랑스와 세네갈의 개막전을 지켜본 뒤 이렇게 말했다.
‘코미디 황제’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 종종 가쁜 숨을 몰아쉬었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을 공격한 암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그는 폐암에 걸려 힘겹게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적극적인 금연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한번의 롱패스로 손쉽게 ‘골’을 넣은 벼락스타가 아니었다. 20여 년의 무명 생활로 가난과 배고픔의 의미를 아는 연예인이었다. 예기치 않았던 인생의 ‘백 패스’와 ‘패스 미스’도 있었다. 절정의 인기를 누린 1980년대,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TV 출연이 금지됐는가 하면 국회 진출에 대한 외부의 따가운 눈총과 방황, 외아들 창원씨의 죽음 등 인생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고인은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웃음으로 서민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대머리에 낮은 코, 작은 눈 등 못생긴 얼굴에 뭔가 모자란 듯 보이는 굼뜬 행동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SBS '이주일의 코미디 쇼'를 끝으로 최근에는 방송 활동이 뜸했지만 그에 대한 서민의 사랑은 여전했다.
지난해 10월 그가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경기 성남시 분당의 집과 고양시 일산의 국립 암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집에는 '후원금을 내고 싶다' '좋은 생약이 있다'는 내용의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부인 제화자씨가 하루 수백 통씩 걸려오는 팬들의 전화로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다.
고인은 이 같은 격려에 힘입어 "갈 때 가더라도 한국 축구대표팀이 월드컵 16강에 진출하는 모습을 봐야겠다"며 강한 투병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고인과 가까웠던 한 지인은 "이주일은 자리에 앉기만 하면 술을 찾고 줄담배를 피워 건강이 악화됐지만, 한국인들이 한 명의 희극인에 대해 큰 애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다.
고인은 1940년 10월24일 강원 고성군 거진면에서 태어났다. 6?25전쟁으로 가세가 기운 그는 1960년대 초반 코미디언이 되고 싶어 유랑극단에 들어가 막일을 도맡았다. 1969년 베트남 파견 장병 위문공연단에서 무대에 올랐고 가끔 남진 나훈아 쇼의 사회를 보기도 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주일이라는 이름 석 자가 알려진 것은 1977년 전북 이리역 폭발사고 때 가수 하춘화를 극장에서 업고 나온 주인공이 되면서부터. 서울 성동구 금호동 판잣집에서 생활하던 그는 1980년 TBC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에 코미디언 이상해와 함께 출연해 ‘수지 큐’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흔드는 오리춤과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유행어를 만들며 ‘못생긴 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고 김경태 PD와 함께 연출을 맡았고 1996년 SBS ‘이주일의 코미디쇼’를 기획한 SBS 이남기 제작본부장은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 출연한 지 한 달도 안 돼 최단 기간에 스타로 떠오른 인물”이라며 “늦깎이 스타가 되기 전까지 고생을 많이 해 인생에 대한 생각이 깊던 연예인이었다”고 회고했다.
92년 ‘코미디 황제’의 정계 진출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경기 구리시에 출마해 당선된 것. 의정 활동을 마친 뒤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간다”는 뼈있는 한마디는 또다시 세간의 화제가 됐다.
가수 조영남은 1981년 서울 중구 북창동의 극장식당 ‘초원의 집’에서 고인과 함께 출연하면서 최근까지 절친하게 지냈던 연예인. 그는 “이주일형은 웃음으로 국민에게 위안을 주었던 큰 그릇이었지만, 본인은 최악의 슬픔을 갖고 있었다”며 “옆에서 보기에 그의 삶은 7대 독자인 아들이 숨지고 정치인으로 방황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그의 병실을 지켜온 후배 코미디언 이용식은 “지난 달 31일 주일이형이 평소 좋아하던 ‘영양탕’을 먹고 싶다고 해 음식을 먹으러 가던 도중에 의식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게 끝이었다”며 “2006년 독일 월드컵 개막식을 함께 보자며 적금을 들기로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방송가에서는 “고인은 마지막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이제 영원히 웃을 수 있는 곳에서 축구와 웃음을 위한 새로운 무대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그의 인생은 아름답다

▶웃음과 함께 한 40년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반백의 수염과 흰 머리카락이 눈에 띕니다. 뒷짐 지고 물러나 허허롭게 웃으며 원로 대접을 받을 만큼 세월이 흘렀네요. 전혀 다른 스타일과 테크닉으로 무대를 장악하는 후배들의 재능과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박장대소 뒤로 흐르는 땀과 눈물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 역시 밤잠을 설쳐가며 아이디어를 짜내고 연습을 반복하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웃기지 못하면 사라지고 마는 이 세계의 경쟁은 대한민국 그 어느 집단보다 치열합니다.
그는 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더 많은 공연을 기획하고 준비했지요. 이제야 앞니 빠진 촌 늙은이의 따뜻한 웃음과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의 맑은 미소를 연결짓는 법을 터득했으니까요.
웃음주머니에 인생살이의 고단함과 힘겨움, 눈물과 한숨을 넣어, 이주일만의 풍자와 해학을, 적어도 10년 아니 20년은 더 펼치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체력도 뒷받침된다고 믿었지요. 지난 연말에는 MBC로부터 공로상도 받았습니다. 서재를 가득 채운 트로피와 상패는 노력의 대가, 인기의 증거지요. 40년이 넘도록 무대에 섰으니 자격은 충분합니다. 코미디언 최초로 세종문화회관에서 단독공연을 가졌던 1999년의 늦가을 등 몇몇 멋진 장면을 수상의 근거로 내세울 수도 있겠지요. 공로상을 주겠다는 연락을 받고, 혹시 그는 저 세상으로 먼저 간 선배들을 떠올리며 이렇게 혼자말을 뇌까리지 않았을까요. 이 끔찍한 병마가 아니었다면 과연 내게 공로상이 왔을까. 설령 방송국에서 공로상을 주겠다고 해도 물리치지 않았을까.

▶담배, 낯선 내 안의 적
여기, 일산 국립암센터 어두운 병실에 한 인간이 있습니다.
폐암 환자 정주일. 푸른 잔디가 깔린 축구장이 눈에 어립니다. 90분을 내리 뛰어도 지치지 않는 강한 심장과 폐를 지녔었지요. 멕시코 4강 신화의 주역 박종환 감독도 그보다 더 오래 더 빨리 달리지는 못했으니까요. 고향 후배 황영조가 오르던 몬주익의 언덕이 축구장 위로 겹칩니다. 40년을 정말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의료용 산소통과 한 움큼의 약이 갑자기 그를 멈춰 세웁니다. 죽음, 그 낯선 존재와의 정면대결을 강요합니다.
삶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느낀 적이 있긴 합니다. 1991년, 그는 아들을 먼저 보낸 죄인이 되었지요. 어느 소설가의 절규처럼, ‘한 말씀만 하소서’, 신을 원망했을 겁니다.
과연 나는 이 슬픔에서 벗어나 무대에 다시 설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펭귄 춤을 추고 바보 흉내를 낼 수 있을까. 그때 그는 비탄에 잠긴 아버지의 입장이 아니라 아버지의 코미디를 좋아하며 자란 아들의 선한 눈망울을 살폈는지도 모릅니다. 일어나세요, 아버지! 아버지가 계실 곳은 이 슬픔의 골방이 아니라 저 기쁨의 무대입니다. 그는 아들의 뜻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월암 장학회를 만들고 방송을 재개했었습니다.

▶갈채 대신 가족 품으로
MBC와의 인터뷰에서도 공개적으로 밝혔듯이, 그는 병이 든 후 24시간을 내내 늙은 아내와 보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세월의 무게를 함께 이고 온 아내가 정말 정말 고맙고 사랑스럽다는군요. 환호와 박수갈채가 사라진 자리, 홀로 아파하는 그를 따뜻하게 보듬는 가족이란 존재가 아름답습니다.
그는 자신을 덮친 병마를 불운이나 불행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원인을 철저하게 따지고 분석한 후 내 안의 적(敵)을 몰아내자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생활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던 담배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죠. 일찍이 소설가 최인훈은 ?회색인?에서 ?생활,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맘만 먹으면… 맘먹는다는 게 좀 대단한 일이지만?이라고 적었습니다. 담배, 그것을 끊는 것은,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요. 허나 그 마음을 먹지 못해 해마다 만오천 명이 암에 걸려 인생의 무대에서 비참하게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여기, 목청 높여 금연을 주장하는 한 인간이 있습니다.
그는 권합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일상을 둘러보라고. 훗날 눈덩이처럼 불어나 자신을 삼켜버릴 사소한 습관을 바꾸라고. 그것은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 폐암환자 정주일을 넘어, 먼저 깨달은 견자(見者)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기꺼이 그 충고를 따르겠습니다.

④이주일씨의 생전 활동모습[연합뉴스](2002. 8. 27) [TOP]

고인은 1940년 북한 강원도 고성군의 한 선비 집안의 5대 독자로 태어났다. 1948년 월남한 뒤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지고 그의 아버지가 좌익으로 몰리면서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학시절부터 축구부에서 활약하면서 뛰어난 운동 실력을 발휘하던 그는 춘천고 축구부에서 동급생이던 박종환(朴鍾煥ㆍ65ㆍ여자축구연맹 회장)감독을 만나 각별한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고교 졸업 무렵 박감독과 함께 당시 축구명문이던 신흥대(현 경희대)에 나란히 합격하지만 이씨가 입학금을 노름판에서 날린 뒤 군에 자원입대하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씨는 이후 군대에서 `끼'를 발휘하면서 연예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씨는 못생긴 외모 때문에 숱한 수모와 역경을 겪으면서 20여년 가까이 지방 쇼단 MC와 서울 변두리 극장 무대를 전전하는 무명 시절을 거쳐야 했다.
71년 베트남 파월 장병 위문공연 길에 오르면서 `웃기는 코미디언'으로 조금씩 이름을 알렸고, 당시 최고 스타였던 가수 하춘화쇼의 단골 사회자가 돼 지방공연을 따라다니기도 했다. 하씨와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77년 이리역 폭발 사고에서 이씨가 하씨를 등에 업고 폭발현장에서 구해낸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이후 마흔살이 되던 해인 79년 MBC 「웃으면 복이와요」로 비로소 TV에 데뷔했지만 못생긴 외모 때문에 시청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기회는 곧 다시 왔다.
80년 1월 19일에 방송된 TBC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우연찮게 이름을 알렸던 것.
'윤수일씨가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 나와서 타잔놀이를 하고 있는데 전 그 옆에 대사 한마디 없이 서 있는 엑스트라였습니다. 그런데 처음 TV에 나가게 돼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타잔이 줄을 타고 연못 위를 지나가게 됐는데, 조연출자가 나한테 손가락질을 하면서 `큐!' 한단 말예요. 난 `큐'를 처음 받아 봐서 날 보고 이리 오라는 줄 알고 그쪽으로 가다가 줄타고 내려오던 타잔하고 부딪쳐 연못 속에 빠지고 말았어요. 실수로 물 속에 빠졌다가 당황하고 얼굴을 드는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제가 스타가 된 것은 순전히 실수였습니다.' 훗날 이씨는 자신의 데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씨는 이주일 만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그의 예명은 `이주일'이 됐다.
이후 탄탄대로를 달리는가 싶더니 80년 8월 연예인 숙정작업과 함께 코미디언 배삼룡, 가수 나훈아, 탤런트 허진 등과 함께 `저질' 연예인으로 낙인찍혀 하루 아침에 방송사에서 쫓겨나는 불운을 맞았다.
그러나 이듬해 '뭔가 보여주겠습니다'라는 유행어와 함께 브라운관에 다시 복귀하고 유흥업소에서 `밤무대의 황제'로 떠올랐다. 서슬 퍼렇던 시절, 그는 밤무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를 코미디의 소재로 삼으면서 대중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도 했다.
그런 그를 하늘이 시기하기라도 한 걸까. 91년 11월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28살의 큰아들 창원(昌元)을 교통사고로 잃고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맛봐야 했다.
그의 인생행로가 정치 쪽으로 방향을 튼 것도 이 무렵.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이씨는 평소 친분이 있던 고(故)정주영 회장의 권유로 우여곡절 끝에 92년 14대 총선에서 통일국민당의 공천을 받아 경기 구리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으로서는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씨는 '정책을 연구할 시간에 경조사에 불려 다녀야 했다'면서 '4년 동안 코미디 잘 배우고 갑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코미디언으로 복귀,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굴곡 많던 그의 인생은 올 한해 극에 달했다.
평소 건강했던 그는 지난해 10월 말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힘겹게 투병하면서도 `금연홍보대사'로 나섰던 것. 평생 남을 웃기며 살아온 그가 병상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고 `이주일 신드롬'과 함께 금연 열풍이 불어닥쳤다. 한번도 은퇴를 선언한 적이 없었던 그는 아픈 육신마저도 대중을 위해 쓴 천상 코미디언이었다.

이주일씨가 남긴 유행어와 어록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 이주일씨가 지방 공연 무대에서 내뱉은 인사말인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한번 봐 주십시오' 혹은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못생겨서 연예계에 나왔으니 한번 잘 봐주시십시오. 자세히 보시면 더욱 못생겼습니다'의 줄임말. 이 말은 관객들에게 폭소를 자아냈으나 그에게는 한과 설움이 쌓인 의미심장한 말이기도 했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 80년 2월 TBC(동양방송)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의 녹화 도중 단역을 맡은 이씨가 사회자 곽규석에게 다가가 불쑥 내뱉은 말. 훗날 그는 '답답해서 미치겠더군요. 내가 나가서 그걸 하면 참 잘하겠는데 내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그때의 기분을 그대로 표현한 것뿐입니다'라고 술회했다.
▲'요즘 아이들이 커가니까 혼자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큰애 결혼시킬 때, 딸 가진 집에서 `이주일 집안과 사돈합시다'하고 기쁘게 딸을 줄까, 또 우리 딸을 시집보낼 때 뉘집에서 우리 딸을 기쁘게 며느리로 맞아 갈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누가 이주일네 집인데 `아이고 좋소' 한다면 나는 잘 살아온 것이고, `아이고, 이주일네와 어떻게 사돈 맺어'하고 고개를 젓는다면 나는 잘못 살아온 겁니다.' = 87년 2월 「월간조선」과 인터뷰.
▲'인기를 사절합니다' = 80년 영동고에 재학 중이던 이씨의 아들이 친구와 싸워 병원에 입원하자 탄식조로 내뱉은 말.
▲'정치도 잘돼야 코미디도 잘됩니다' = 정치와 코미디의 관계를 정의한 말.
▲'제가 방송 출연이 금지된 것은 다 중계방송을 잘못해서 그런 겁니다. 연 날리기 대회였습니다. `네 많은 연들이 날고 있습니다. 휘황찬란한 연들입니다. 한 년, 두 년, 세 년 참으로 많은 년들입니다. 한국년, 중국년, 일본년도 있습니다. 온갖 잡년은 다 모였습니다. 턱 나온 년도 있고, 까진 연놈도 있습니다…'' = 80년 8월 전두환 정권하에서 방송출연이 금지됐을 때 밤업소에 출연해 펼쳤던 개그.
▲'만약 당신 집이 양조공장을 하고 직원이 50명인데 당신이 출마를 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직원들이 오지 않으면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 14대 총선 당시 경기 구리시에 출마한 이씨의 유세장에서 상대방 후보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을 보고 `현대 직원들을 동원한 게 아니냐'고 말하자 이씨가 응수한 말.
▲'4년 동안 코미디 잘 배우고 갑니다' = 92년 14대 총선에서 통일국민당의 공천을 받아 경기 구리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가 정계를 은퇴하면서 남긴 말.
▲'일단 한번 와보시라니깐여?' = 밤무대 업소 CF에 출연하면서.
▲'따지냐?' '콩나물 팍팍 무쳤냐?'
▲'담배를 끊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합니다' = 지난해 10월 말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뒤 금연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브라운관에 고 이주일씨 추모 물결
방송 3사는 `한국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씨의 족적을 기리는 추모 특집 프로그램을 앞다퉈 편성했다.
MBC는 27일 밤 12시25분부터 90분간 다큐멘터리 「추모특집-이주일, 울고 웃긴 30년」을 방영한다. 차인태 아나운서가 진행할 「…울고 웃긴 30년」은 이씨의 암투병 과정을 소개하는 병상 일지와 그의 코미디 인생 30년, 그룹 god의 헌정무대 등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또한 가수 하춘화ㆍ주현미, 탤런트 박근형, 코미디언 전유성ㆍ이용식과 후배 개그맨들이 그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는 코너도 마련된다. 중계차로 빈소를 연결해 일산 국립암센터 내 설치된 빈소의 모습과 조문객과의 인터뷰를 내보내며, 이주일씨의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띄우는 편지가 소개될 예정이다.
KBS 2TV는 27일 오후 11시 특집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광대 이주일」을 긴급 편성했다. 폐암 선고 후 이씨의 투병생활을 소개하며 이주일씨가 무명에서 스타로 발돋움하기까지 그의 굴곡많았던 인생 스토리를 더듬어본다.
SBS TV는 이날 오후 11시5분 「추모특집 이주일, 웃음의 황제」를 방영한다. 이씨의 육성 녹음과 함께 지난 98년 이씨가 마지막 방송했던「이주일의 코미디쇼」등이 소개될 예정이다.

이주일씨 별세 각계 반응
27일 오후 3시15분 한국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씨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평소 그를 따르던 지인들은 통곡을 금치 못했다.
평소 이주일씨를 친형처럼 따랐던 코미디언 이용식씨는 "피를 나누지 않은 제 친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형님이 가시려고 오늘 이렇게 비가 많이 왔나봐요"라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
코미디언 한무씨 역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야만 했다.
"마냥 슬플 뿐입니다. 부모가 죽으면 땅 속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 속에 묻는다고 했는데 고인이 살아 생전 자식 걱정 많이 했던 게 가장 아쉽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런 일을 잊을 만하니까 덜컥 병에 걸리셨지 뭡니까. 월드컵 개막 6개월 전에 시한부 생명 선고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3개월밖에 못산다고 하니까 의사에게 월드컵만 보고 죽게 해달라고 부탁하더라구요. 결국 월드컵을 경기장에 직접 가서 봤고, 이제 다시 독일 월드컵까지 봤으면 하던데… 마지막에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셔서 또 가슴이 아팠습니다."
전 한국연예협회 이사장 석현씨는 "정말 참담할 뿐입니다. 머릿 속에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추억들이 흘러가는 것 같아요"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80년대 초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이주일씨의 인기의 요인을 짚어보기 위해 이주일씨를 수개월간 밀착 취재한 끝에 책 「삐딱한 광대-이주일론」(1987년)을 펴냈던 박성태(현 머니투데이 부국장)씨는 "이주일씨는 대중 앞에 나서면 웃지 않고서는 못 배길 표정과 몸짓의 소유자였지만 개인적으로 만날 때는 그렇게 점잖고 멋있을 수가 없던 분이었는데…"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주일씨와 고교(춘천고) 시절부터 동고동락했던 절친한 친구 사이인 여자축구연맹 박종환 회장은 이씨가 숨지기 전날 그를 병문안 갔다 와서 그만 자신도 병상에 드러눕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 같이 저와 이주일은 가장 친한 사이입니다. 가장 친한 친구를 잃어서 정말 슬픕니다. 제일 가까웠고, 제일 어려웠던 시기를 같이 보냈던 사람이었는데… 어제 그 친구를 만나고 와서 나도 지금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아무말도 못하겠습니다…."
70년대 중반 이주일씨가 본격 데뷔하기 전인 TBC 「고전유머극장」과 80년대 「유머1번지」등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김웅래 KBS 코미디 전문PD는 이씨를 이렇게 회고했다.
"자신이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쳤기 때문에 항상 어려운 후배들에게 잘 대해줘 존경받았던 분입니다. 또한 정치나 영화 등 사회 어느 방면에 있든지 코미디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분이지요. 정치에 잠시 몸담았던 경험을 되살려 시사 코미디 프로 진행을 맡으면서 녹여내기도 했습니다."
후배 코미디언 황기순씨는 "돌아가신 이주일 선생님의 아들과 저하고 나이가 동갑이라 저를 아들처럼 귀여워해 주셨는데, 이렇게 돌아가셔 뭐라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라며 울먹였다.
코미디언 김정렬씨도 "코미디계의 대부로서 한국 코미디 역사에 한 획을 그으신 분인데 이렇게 돌아가시다니 정말 안타깝습니다"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⑤머니투데이 스타뉴스 [TOP]

이주일 선생님. 선생님이 하늘나라로 가신 지 벌써 4년이 돼 옵니다. 선생님과 함께 응원했던 한일월드컵이 벌써 4년 전 일이고, 선생님과 함께 가고 싶었던 독일월드컵이 바로 내일(10일) 개막합니다.
선생님, 2002년 6월19일 대전 경기장 기억나시죠? 선생님이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한 채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붉은 악마들은 반갑게 외쳤죠. "오~필승, 이주일! 오~필승, 코리아!" 그때 선생님 눈가에 맺힌 물기를 저는 잊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30명 남짓한 이탈리아 응원단 바로 앞에서 태극전사들을 응원했습니다. 안정환 선수가 페널티킥을 실축했을 때, 선생님은 누구보다 안타까워 하셨죠.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우리선수들이 밀리는 게 확실해졌을 때 선생님은 그러셨죠. "역시, 이탈리아가 잘 해. 안정환이가 처음에 넣었어야 했는데.."
그리고 후반전 43분, 마침내 설기현 선수가 회심의 동점골을 넣었을 때 대전구장은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마구 흔들렸습니다'. 앞 자리에 있던 붉은악마들도 선생님을 돌아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선생님도 비록 휠체어에 앉아계셨지만 마음만은 그라운드로 향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연장전 안정환의 역전골. 선생님은 우셨죠.
그랬습니다. 월드컵. 그해 초부터 일산암센터와 분당 자택을 오가며 그놈의 몹쓸 폐암과 투병하시면서도,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생의 마감을 예감하셨으면서도, 선생님은 축구와 월드컵 이야기를 하실 때면 얼굴이 환해지셨죠. 그러다 프랑스와 세네갈 개막전을 마침내 상암구장에서 봤을 때, 선생님은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셨죠. "저러다, 프랑스가 지겠는데"라는 선생님의 축구전문가급 혜안은 그대로 적중했습니다.
그 월드컵이 바로 내일 독일에서 열립니다. "내가 다 나으면 독일로 같이 가서 응원하자"던 그 월드컵 말입니다. 선생님이 지적하신 국가대표팀의 수비불안은 여전해 보이지만, 그래도 저는 믿습니다. 구장에서 본 이탈리아전, 병상에서 본 미국전 때는 없었던 박주영이나 조재진 같은 젊은 선수들이 뭔가를 해낼 것이라고요. 그리고 선생님도 분명히 하늘나라에서 우리 젊은 선수들을 응원해주실 것이라고요.
하지만 왠지 이 들뜬 마음 한 구석이 휑해지는 건 무슨 까닭인지요. 독일월드컵, 응원은 뜨겁게 하겠지만 우리는 진정 축구와 태극전사를 사랑하는 걸까요. 종목에 상관없이 오직 국가대항전의 승리와 기쁨만을 사랑하는 건 아닐까요. "김 기자, 쟤들(태극전사들)이 져도 좋아할 수 있어? 그래야 진짜 축구를 사랑하는 거야"라는 선생님 말씀은 그래서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선생님의 축구사랑을 듬뿍 담아 독일로 보내고픈 오늘입니다.

⑥‘코미디 황제’ 이주일 [TOP]

한국 연예사에 이주일 형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도 드물다. 그는 한국 코미디 역사에 분기점 역할을 맡았다.
장소팔·후라이보이·구봉서·배삼룡으로 이어진 전통(?) 코미디는 그를 기점으로 신(新)코미디, 즉 미국식 현대 코미디로 바뀌었다.
그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혹은 “괄시를 받은 만큼 큰다”는 말의 절대적 표본이다. 1960년 초 유랑극단을 따라 다닐 때 단장이 버스가 떠나기 전 단원을 점검하다가 초짜 사회자 이주일을 보자 “넌 뭐야. 못 생겼으니 당장 내려!” 했다는 전설적 일화가 이를 증명한다.
이주일 형은 또 “스타는 혜성처럼 나타난다”는 말의 표본이기도 하다. 누구든 연예계에 나올 땐 일정 기간 뜸을 들이며 방송가 주변을 서성거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하루 아침에 떠서 코흘리개부터 어른들까지 전국민의 사랑을 몽땅 독차지 하는 진기한 기록을 세웠다.
나는 그가 한국 연예사상 최고 개런티를 받고 북창동 밤무대에 출연하던 시절부터 같은 무대에 서는 영광을 누렸다. 나는 미국에서 막 돌아온데다가 이혼까지 겹쳐 최악이던 시절이었다. 그런 나는 펄펄 날던 ‘나이든 신인’ 이주일을 하늘처럼 올려봐야 했다.
무대에서 그는 사람들을 배꼽잡게 했지만, 무대 밖에선 말을 붙이기 힘들게 차가워 보이는 사람으로 변했다. 오죽하면 밤무대 생활을 몇 년이나 함께 한 내가 기억하는 소리가 “야! 영남아 술 좀 가져와라!” 뿐일까. 이주일 형이 그 시절 또 다른 ‘취선(醉仙)’이던 조용필과 둘이 해운대에서 밤 새 술 마시다 뻗은 다음날 새벽, 모래밭에 반쯤 파묻혀 잠든 그를 본 사람들이 “이주일이다” “아니다” 실강이 했다는 일화도 한동안 우리들 입에 올랐다.
나도 이주일 형과 엉망으로 술마시고 아파트 승강기까지 부축한 적이 여러 번이다. 그런 어느날 형이 비장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야! 어젯밤 문을 박차고 들어가 술 가져오라고 소리쳤더니 온 집식구가 안방에 이불을 쓰고 숨어 발발 떠는 거야. 자세히 보니 우리 식구가 아니었어.” 한층 아랫집으로 잘못 찾아들어가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었다.
이주일 형에 얽힌 일화는 거기서 끝나질 않는다. 10여년 전 하와이로 단체 공연여행을 했을 때였다. 형이 허리를 잔뜩 움켜쥐고 김포공항에 나타났다. 3일을 배탈설사로 고생 중이라고 했다. 그때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탤런트 이모씨가 지나가길래 나는 농담삼아 “형, 저 분한테 안수기도를 받아”라고 했다. 그때 공교롭게도 윤복희 집사님이 지나갔다. 나는 급히 “형! 윤집사님한테 기도를 받으면 당장 끝날 거야”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하와이의 호텔 식당에서 이주일 형을 보자마자 달려가 물어봤다. “형, 차도가 좀 어떠우?” 대답은 이랬다. “야! 말도 마! 기도를 너무 심하게 받았나봐. 지금은 변비야.”
불과 몇 달 전까지 누구도 이주일 형의 건강을 의심하거나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후배들과 축구시합을 할 때도 박종환 감독의 친구답게 왕년의 선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건 순전히 나 혼자 목격한 일인데, 그 옛날 밤무대 대기실에서 껄렁대던 괴한을 의자에 앉은 자세에서 관자놀이를 발로 걷어차 한방에 쓰러트린 적도 있다. 아! 그때 형이 나를 곁눈질로 보며 으스대던 폼이라니.
‘이주일 코미디’는 늘 체험에서 우러났다. 그중에도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따라 실제로 국회의원 뱃지를 달면서 “발기대회 연다길래 발기 좀 해볼까 하고 가봤더니 정주영·김동길·강부자 같이 맨 발기와 관계없어 보이는 사람들만 앉아있더라”던 우스갯소리는 더 이상 재미있을 수 없는 ‘개그의 백미’였다.
이주일 형은 은퇴를 선언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현역이다. 다만 이젠 코미디 대신 너무도 진실되고 너무도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여러분 담배는 끊어야 합니다”라고. 나는 이주일 형이 건강을 되찾아 그토록 좋아하는 월드컵대회를 앞으로도 세번쯤은 더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2002.05.21조영남)

⑦이주일의 사진앨범  [TOP]


[춘천고 2학년 봄소풍때(가운데 앉아있는 사람)]

   
[1983 세계청소년축구 4강신화 박종환 감독] [군대시절] [군예대시절]

 
[유랑극단 시절] [1987 12월 힐튼호텔 디너쇼]

 
[1980년대 가수 혜은이씨와 공연] [1983 대한축구협회 잔디구장기금 1000만원 전달]

 
[1970년대 하춘화씨와 공연] [TV쇼에서]

 
[1980년초 밤업소에서] [1983년 박원숙과 출연 "얼굴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하춘화씨와 함께] [TBC 촬영중인 모습]

  
[1980년 TBC 토요일이다 전원출발] [서울구락부에서 열연하는 모습]


[1980년초 이대성, 이주일, 정동섭장관, 이태섭장관, 구봉서]


[1980년대 중반 분장실 나미,배연정,주현미]

 
[활기찬 이주일씨의 모습] [1997년 투나잇쑈를 진행하는 모습]

 
[국회의원 시절] [국회의원 시절]

 
[열연하는 이주일씨] [웃고있는 이주일씨]

 
[이주일씨와 장명수 사장] [이주일씨의 한가로운 한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