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계파 [TOP]
延日(迎日,烏川)鄭씨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29대손, 포은공파 19대손
②요약 [TOP]
▣생몰 :
▣직업 : 항일의병
항일의병. 용인군 모현면 능동에 살았다. 당시 연령 27세의 어엿한 양반 문벌태생이며 도학(道學:儒學)에 능통하고 높은 학문적 수준을 지니고 있어 일본 경찰도 그 인물됨을 인정했을 만큼 장래가 촉망되는 장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군대 해산 등 날로 쇠망해가는 국운을 개탄하던 차 융희원년(1907) 7월 충주 주현의 친척집으로 가던 중 마침 이천 장호원에 이르렀을 때 의병대와 일본군 사이에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철화는 길을 피하여 여주군 청안동(靑安洞)의 사잇길로 들어섰다가 일본 군대의 밀정으로 오인되어 의병 포군에게 잡혔다. 그가 의병진에 이르렀을 때 의병장 방인관(方仁寬)을 만났고, 그로부터 일본군을 격퇴하고 우리의 국권을 회복하자는 권유를 받자, 의기투합하여 의병으로 나서는 계기가 됐다. 그 후 의병장 정병규(金炳奎) 휘하에서 의병 30여명을 거느린 두령이 되어 안성군에 들어가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일병의 군수자금 1천5백 냥을 탈취하여 군자금으로 사용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등 구휼활동에도 힘썼다. 그의 활동무대는 경기지역 뿐만이 아니라 경상도 지방까지 뻗쳐 신출귀몰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일본의 통감부를 격파하려던 의병 군사장 허위(許蔿)의 부하로써 활약하였음이 여러 기록에 나타난다. 그 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의병 토벌작전으로 말미암아 의병대가 흩어지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을 인솔, 상경하여 남대문안 사직동에 은거하던 중 체포되어 융희2년 5월 29일 15년의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출옥한 후에도 독립의군부(獨立義軍部) 사건에 가담, 활동하던 중 검거되었다.
③독립의군부 사건 [TOP]
일본 경찰의 극비문서인 고등경찰요사 영인본인 일명 폭도사 편집 자료에 독립의군부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독립의군부 사건 본건 범죄는 대정2년(1913) 9월 박인순(朴寅淳), 전용규(全容圭)등의 제의에 따라 경성에 독립의군부 중앙군부총장이라는 것을 설치하고 각 도에는 도순무총장(都巡撫總將)을, 각 군에는 군수(郡守), 면에는 향장(鄕長)을 배치하고 내각총리대신 총독이하 조선 내 대소 관원에 대하여 상시 국권을 반환하는 서면(글)을 보내어 일본 관원이 조선통치가 곤란하다는 것을 주지시키며 일본에 열복하는 것을 막게 하거나, 조선 또는 조선인으로 하여금 국권회복의 여론을 일으키게 하는 관견(管見)이라는 글을 휴대하고 대정 3년(1914) 4월부터 동년 5월에 걸쳐 동지(同志)를 모집하던 중, 발견되어 검거하였다. 당시 한국 제일의 활동가(의병)임을 자칭하던 유자(儒子), 허위(許蔿)의 일족, 부하 또는 교유자등 다수와 또 상당히 저명한 유자 이기상, 이기영, 정재영, 정철화(경기도 용인군 능동출신, 폭도 허위의 부하) 등이 관련된 결사조직은 심각한 국권회복의 사념을 품고 있는 것으로 인지되며, 이에 관련된 자는 54명에 이른다」 위의 기록 등으로 보아 의병 정철화는 명망 있는 유자 출신으로, 소규모적인 의병활동 뿐 아니라 총독부의 정세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出典]의병항쟁사(3), 고등경찰요사, 평리원 재판기록
④묘소 [TOP]
▣소재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