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파 [TOP]
延日(迎日,烏川)鄭씨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代孫, 포은공파(圃隱公派) 代孫
◐요약 [TOP]
▣생몰연도 : 1911∼1976
▣벼슬 : 서양화가
1911년 3월 5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태어나 1929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재 경복고)를 졸업하였다. 경성고보 재학중에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1927)와 제7회 조선미술전람회(1928)에 잇달아 회화 <고성>과 <역전의 큰길> 등이 입선하여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어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경제사정과 건강문제로 곧 그만두고 귀국한 뒤 통속적인 내용의 유화와 출판 삽화를 그렸다. 1929년과 1930년에도 계속하여 선전에 입선하더니 1931년 제10회 선전에서 작품 <빙좌(?座)>로 특선하였다. 이 해 선전에서 이상의 <자상>이 입선했고, 나혜석도 특선에 올랐다. 1935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전문 삽화가로 활동하다가 다시 조선일보사로 옮겨 이후 광복될 때까지 소설 삽화를 그렸다. 이 때까지의 대표적 작품에는 유화 《3등대합실》(1933), 《녀자좌상》(1934), 《대합실》(1941) 등이 있다.
1927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 인물, 풍경 소재의 유화로 거듭 입선과 특선에 몇 번 오르며 양화계에 진출하였다.한때 동경에 가서 수업하기도 하였으나 시종 독학하였으며, 수법은 보편적 사실주의 테두리에서 견실성을 보였다.
1934년 초현실주의 예술운동을 꿈꾸며 신백수, 이시우, 조풍연 등과 함께 동인지 《삼사문학(三四文學)》을 창간했으며, 이 잡지에 <생활의 파편> 등 몇 편의 산문과 시를 발표하였다. 1934년 구본웅, 김경준, 권영준 등과 <신회화예술협회>를 결성하였으며, 이 해에 선전에서 회화 <좌상>으로 두 번째 특선에 올랐다. 《삼사문학》제3집에 <사실주의 화화 만보>를 발표하였다.
1935년 동아일보사 기자로 입사하여 이무영의 소설 <먼동이 틀 때>의 연재 삽화를 그렸다. 이후 장혁주 소설 <여명기>, 김말봉 소설 <밀림> 등의 삽화를 그렸다. 1937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한 후 1937년 12월 조선일보사에 취직하여 신문은 물론 《조광》《여성》《소년》잡지에 수많은 삽화와 표지화를 그리며 당대의 대표적인 삽화가로 활동했다. 1938년 화신화랑에서 열린 중견화가 근작 양화소품전에 길진섭, 이종우, 구본웅 등과 함께 출품하였으며, 함대훈의 장편소설 <무풍지대>와 구본웅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장정을 맡았다.
김남인 김해강 합동시집 <청색마>(1940) 이광수 소설 <사랑>(1941), 이효석 단편집 <황제>(1943), 이무영 창작집 <흙의 노예>(1944), 박태원 <삼국지>(1945) 등의 장정도 모두 정현웅의 작품이었다. 1945년 해방 직후 서울신문사에 자리를 잡고 시사교양지 《신천지》의 편집장을 맡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북디자인’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기에 많은 문인들의 책 장정을 도맡아 했다.
1940년 조선미술전 입선작 (대합실 한 구석)의 인물군상은 일제 밑에서 살 길을 잃고, 만주 북간도 등지로 떠나야 했던 한 가족의 참담한 처지를 주제로 삼은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신천지》 편집부장, 조선미술건설본부(중앙위원장 高羲東) 서기장이 되었다가 정치적으로 좌익편에 서면서 조선조형예술동맹 및 조선미술동맹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그 시기에는 본분의 그림활동은 거의 없었던 반면, 서울신문사가 발행하던 월간잡지 [신천지 新天地]의 편집인 위치에 있었다.
1946년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여 사업주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윤석중 동요집 <굴렁쇠>(1948), 오영수 창작집 <소복>(1949), 한하운 시집 <한하운 시초>(1949), 황순원 소설 <별과 같이 살다>(1950) 등 많은 책들의 장정을 했다. 경향신문 연재소설 김영수의 <파도>(1949), 서울신문 연재소설 박태원의 <임진왜란>(1949), 태양신문 연재소설 이광수의 <사랑> 등의 삽화를 맡았다. 그리고 어린이 만화와 시사만화 등을 그려 초창기 한국 현대만화의 선구자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1950년 전쟁 시기에 남조선미술동맹 서기장이 되었고, 9월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월북하였다. 이후 북한에서 활동하면서 국립미술제작소 미술부장으로 역사적인 조선노동당 제3차전원회의 회의장 장식을 맡아하였으며 그 후 1957년까지 물질문화보존위원회 출판부장으로서 안악 제1, 제2, 제3호 고분, 강서고분 등 고구려 옛무덤들의 벽화들을 많이 모사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조선미술동맹이 와해되자 사상적 전향을 표명하였으나, 1950년 6, 25 발발 직후 서울에 북한체제 영합의 남조선미술동맹이 결성되자, 서기장으로 있다가 결국 북으로 넘어갔다.
그뒤 북한에서는 수채화, 유화, 펜화를 비롯하여 각종 출판물의 삽화와 그림책의 원화제작 등 다채로운 활약을 하였으며 고분 모사에도 뛰어나 1952년부터 1963년까지 황해도 안악1~3호 고분 벽화를 모사하였는데, 이때 그린 모사도는 조선미술박물관·조선역사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다. 미술제작소 회화부장과 물질문화유물보존위원회 제작부장(1951~1957), 조선미술가동맹 출판화분과 위원장(1957)을 역임한 뒤 1976년 죽을 때까지 현역 작가로 활동하였다..
1960년 무렵부터는 조선화(전통회화)에도 손을 대면서 정치적인 주제화들 외에 역사화, 풍경화, 인물화 등의 작품활동을 하였다.그밖에 1952년과 1962∼1963년 같은 월북화가인 손영기(孫英奇)와 공동작업으로 황해도의 안악1∼3호분 고분벽화를 모사한 사실이 확인되어 있다.
1961년 평양신문에 연재된 엄흥섭의 소설 <동틀 무렵>의 삽화를 3년간 그렸으며, 1957년부터 1975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 출판화분과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수령 형상을 위한 미술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여 수채화 <3.1운동을 목격하시는 김일성원수님>(1968), 조선화 <비밀혁명소조모임을 지도하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1972, 리완성과 합작) 등을 남겼다. 그리고 삽화 <토끼전>(1955), 동화그림책 <청개구리에 대한 이야기>(1959), 수채화 <누구 키가 더 큰가>(1963), 조선화 <실뜨기>(1966) 등이 남아 있다. 1976년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 소속으로 있었다.
주요 작품에는 문학예술상 1등상을 받은 《리순신 장군 한산도해전》(1955), 《조선민족해방투쟁사》(1957), 수채화 《아침의 대동강》(1959), 국가미술전람회 1등상을 받은 아동화 《누구 키가 더 큰가》(1963), 조선화 《유격 근거지에서 부녀회원들의 활동》(1961), 《3·1운동을 목격하시는 김일성 원수님》(1968) 등이 있다. 그 밖에 그림책 《콩쥐팥쥐》(1949), 《아름다운 만경대》(1959), 《청개구리에 대한 이야기》(1959), 단행본 《조선미술이야기》(1955) 등을 출간하였다. [참고문헌] 近代韓國美術史의 越北作家와 作品-北으로 간 畵家들-(金星出版社, 1990), 월북화가 鄭玄雄의 생애와 작품(中央日報社, 月刊美術 19, 1990.7.).(李龜烈)
◐정현웅의 작품들 [TOP]
"콩쥐팥쥐"는 36쪽 분량으로 한쪽당 4칸을 기본으로 칸마다 지문과 말풍선을 넣었다. 4등신의 동글동글한 얼굴을 가진 등장인물이 귀엽고 동작과 표정이 살아있다. 특히 노랑저고리와 붉은 치마 차림의 콩쥐가 애잔하다. "아리바바"는 희화체로 "콩쥐팥쥐"와 형식은 같지만 묘사의 밀도가 높다. 말풍선 외에 굳이 지문을 넣은 것은 일본의 지배에서 갓 벗어난 어린이들이 한글을 익히는데 도움을 주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콩쥐팥쥐"와 "아리바바"는 한국전쟁 당시 10살이었던 화가 권오웅씨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하면서 책가방에 넣어 간직한 것이라고 한다.(현실문화 제공)
◐정현웅화백 사진연대기 [TOP]
오래 잊혀진 정현웅 화백 이야기를 그의 둘째 아들 정지석씨의 자료도움을 받아 이어 소개합니다.
정현웅 화백 鄭玄雄 畵伯
1910년 9월 20일(양력), 8월 17일(음력)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90번지에서 태어나고
1976년 7월 30일(양력) 자택에서 폐암으로 작고함
결혼 즈음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
부친 정상호(鄭尙鎬) 본관 연일(延日)은 8대를 줄곧 서울에서 살아온 선비집안의 개화지식인이었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이강공(李堈公) 의친왕( 義親王)의 친구로서 이강공(李堈公)의 두 아들 이건공(李鍵公)과 이우공(李?公)의 가정교사로서 궁(宮)에서 이들을 교육시켰다.
모친은 청주 이씨(淸州李氏)이다.
정현웅은 2남4녀 중 차남으로 위로 세분의 누님 정명희, 정명선, 정명옥 그리고 5살 위의 형 정인우(鄭仁祐)와 여동생 정명은이 있다.
집안이 빈한해서 부모로부터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미술학교도 못 가봤다. 혼자 공부하고 노력해서 서양화가로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등단했고 특선작가라는 최고의 영예까지 올라갔다.
역시 혼자 노력해서 삽화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가 장정을 그리면 책의 가치가 달라질 정도였고 장정의 대가라는 평을 받았다.
혼자 배워 잡지의 편집에 수완을 발휘했고, 그가 관여한 잡지들은 인기가 있어 잘 팔렸다.
월북 후 누구도 성공해보지 못한 고구려 고분벽화를 모사해서 남북을 통해 미술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위업을 달성했다.
월북 후 조선화를 새로 배워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아동화가로서, 역사화가로서 빛나는 업적들을 남겼다.
자택에서 가까운 종로구 필운동 자락에 위치한 매동보통학교를 1920년에 입학한 뒤 역시 자택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인 경성제2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로 1924년에 월반해서 입학했고 1929년(소화昭和 4년, 일제식 년도표기) 3월 6일에 졸업했다. 이것이 그의 학벌의 전부이다.
경성제2고보 재학 당시 일본인 도화(圖畵, 미술) 선생이던 야마다 신이치(山田 新一)에게서 미술을 배웠고 졸업 후 일본 가와바다미술학교(川端畵學校)에 들어갔으나 가세가 기울어 집안에서 학비를 대줄 형편이 못되었다. 몸이 허약하여 고학을 할 형편도 못되어 6개월 만에 돌아온 뒤로는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서양화가 운봉 심형구(雲峰 沈亨求)가 동급생이었다.
후배로는 서양화가 이대원(李大源), 장욱진(張旭鎭), 유영국(劉永國)이 경성제2고보 출신이다.
1939년 10월 4일 평양 신공회당(新公會堂, 시에 있는 회관)에서 남궁요안나(南宮?安那)와 결혼식을 거행했다.
함흥 영생고보 교장이던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 박사의 사촌동생 김관식(金觀植) 목사가 주례를 맡았다.
뒷줄 왼쪽부터 형님인 정인우(鄭仁祐), 장인 남궁혁(南宮爀) 신학박사(평양신학교 교수), 주례김관식(金觀植) 목사, 장모 김함라(金涵羅), 반주자, 앞줄 왼쪽부터 김광신 장로, 처남 남궁(南宮) 다니엘(?世), 신랑 정현웅, 신부 남궁요안나, 신부의 친구 이경희(전 효성여대 기악과 교수), 정비다(피아니스트·박대선 전 연세대 총장의 부인).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일보사의 동료였던 화가 웅초 김규택(熊超 金奎澤), 소설가 이석훈(李石薰)이 신랑친구의 대표로 서울에서 올라와 참석했다.
결혼식을 서울이 아니라 신부 친정인 평양에 가서 했기에 신랑쪽에서는 형님 정도만 참석.
이화여전 기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남궁요안나(南宮?安那 1915년생)와 결혼했다. 신혼여행지인 백암온천에서 찍은 사진
결혼 후 분가해서 해방 전까지 뚝섬에서 살 당시의 사진.
앞줄 오른편에 서있는 아이가 큰아들 정유석(鄭有碩, 정신과 의사, 미국거주)이고, 무릎에 앉아있는 아기가 차남 정지석(鄭之碩 약사)다.
차남 정지석의 돌 때 쯤 사진관에서 찍은 것으로 형 장남과는 년년 생
월북 후 1956년 불가리아 방문 전후에 찍은 사진
1960년대에 북에서 찍은 사진
해방직후 1945년 8월 18일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기장으로서 친일미술인들 10여명을 명단에서 제외시키는 작업의 중심역할을 했고 1948년 좌익계열인 조선미술동맹 간부로 활약했다.
해방 후 남한의 혼탁한 미술계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중, 6.25 인공치하에서 남조선미술가동맹의 서기장의 직책을 맡았다.
젊은 시절부터 마음속에 그려오던 민족주의적 인민민주사회주의의 실현이 눈앞에 펼쳐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국군의 9.28수복으로 인해 꿈이 잠시 무산되는 것 같았고 급히 피신하지 않을 수 없어 가족들을 남에 남겨두고 월북 했다.
6.25 월북 때 남한에 남겨두고 간 가족들.
장남 정유석과 차남 정지석이 1964년 같은 날 각각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약학대학을 함께 졸업하던 날의 사진.
왼쪽부터 막내 딸 정현애(鄭玄愛, 첼리스트), 차남 정지석, 부인 남궁요안나, 장남 정유석, 삼남 정이석(鄭以碩, 건축설계사)
이 네 자녀를 부인 남궁요안나가 정신여자고등학교 음악교사를 하며 홀로 키웠다.
북 후 북에서 남궁련(공훈배우)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자녀
왼쪽이 정륜, 오른쪽이 정현정. 1976년 별세하기 2주 전에 찍은 사진
1990년 장남 정유석이 미국 해외동포 자격으로 북한에 방문, 북의 가족들에게서 얻은 사진.
◐정현웅 화백의 서양화 [TOP]
*화가 정현웅(鄭玄雄)은 1935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면서 신문 삽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1930-40년대 대표적인 삽화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신문과 잡지에 다양한 평론을 게재하며 뚜렷한 예술관을 드러내 문예계와 미술계를 넘나드는 활약을 하였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시 월북하여 북한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사업을 주도하였고 삽화를 위시한 출판 미술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 글은 정현웅 화백(1910-1976)의 둘째 아들인 정지석씨의 자료도움을 받아 이어 씁니다.
<여름의 온실 속>, 1929년 작
정현웅의 초기 작품들은 서양미술사조의 영향 아래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는 과정에 있었다. 화면의 틀은 마치 온실의 문인 듯이 표현하고 화면에 꽉 차도록 온실의 전경을 담았다. 여백 없이 빽빽이 들어찬 식물들의 율동적인 곡선이 매우 장식적인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후기 인상주의 작가인 피에르 보나드(Pierre Bonard)나 야수주의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영향을 받은 일본화단의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보다 직접적으로 앙리 마티스의 <열린 창문(La Fenetre)>을 연상시킨다. 창문을 가득 채운 구성이 매우 비슷한 인상을 주는데, 색채 또한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면 매우 화려한 그림이었을 것이란 추정을 해볼 수 있다."
미술사학자 최리선
<해질녘>, 1930년
멀리 경성부 청사(京城府廳舍)(현 서울시청)의 모습이 보이는 을지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전의 한적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작품들과 구별되는 불안과 우울이 느껴지는 풍경화이다. 김주경(金周經)은 “특선에 들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칭찬하면서 이 작품을 ‘뭉크적’이라고 평했고(제9회 조선미술전람회,『별건곤』 1930.7) , 또한 김용준(金瑢俊)도 비평을 통해서 이 작품이 뭉크적인 감성을 표현했음을 확인했다.(제9회 미전과 조선화단, <중외일보>, 1930.5.25.)
"정현웅씨의 작품은 신감각(新感覺)의 소유자다. 그는 현대 도회에 퍼덕이는 세기말적 우울(憂鬱)과 초조(焦燥), 고민(苦悶), 절망(絶望), 비애(悲哀), 환상(幻像), 죄악(罪惡)을 그리하여 그것이 현대인의 말초적 신경을 자극시키고 공포를 일으키게 하고 자살행동을 취하게 하는 도회의 조류를 그렸다. 그의 점경(點景)은 우상화(偶像化)하고 백치화(白痴化)한 마비(痲痺)된 신경의 소유자들이다. 풍경에서 보이는 이상한 금색의 무거운 반사와 뒤틀어진 선…. 이 기괴한 말세 도회의 감각이 작가의 시각에 괴롭게 비쳤다. 작자는 음영(陰影)의 공포를 느끼고 카민과 카도미늄 옐로와 뷔리단의 매력에 취하였다. 관자(觀者)는 이 그림에서 괴로운 현대를 느끼었다. 뭉크의 공포가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해질녘>은 뭉크(E. Munch)의 1892년 작인 <카알 요한의 밤거리(Evening on Karl Johan)>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표현주의적인 작품은 아카데믹한 경향이 짙은 조선미전에서는 매우이색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의 초기작들에서 보여주는 진보적인 화풍은 조선화단의 서양화풍의 수용양상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최리선)
<곡예사>, 1930.
피카소(Pablo Picasso)는 파리의 서커스단 근처에서 살면서 곡예사들의 소외되고 고독한 삶을 통해 대체로 서정적이며 애조를 띤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그는 <곡예사 가족(Family of Saltimbanque)>를 비롯해서 1900년대 초부터 서커스나 카니발의 주제를 다룬 일련의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피카소의 작품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이다. 천막과 깃발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광경은 서커스단이나 유랑극단의 외관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술에 취한 듯이 보이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피카소의 곡예사와 유사한 옷을 입고 서 있는 인물도 눈에 띈다.
정현웅은 그가 남긴 많은 삽화와 도안화 등에 피카소를 인용하고 있다. 피카소가 곡예사들을 통해 자신의 감성을 투영하는 대상으로 삼았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 도시 서커스단의 모습을 표현하면서 자신의 현실세계에 대한 우울하고 명상적인 감성을 담아내고자 했다. (최리선)
여러 잡지에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글을 게재할 정도로 서양화단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별히 미술학교를 다니거나 사사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혼자 연구하고 노력해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발전시켜 나갔기에 누구의 영향으로부터도 간섭 없이 자유롭게 서양미술을 폭 넓게 시도해 보고 탐구할 수가 있었다. (최리선)
◐정현웅 화백의 인물화 [TOP]
천연색 그림모델은 14살 때 정현웅의 여동생 정명은, 6.25 이전 유일하게 남한에 남아 있아 있는 작품이다. 캔바스에 유채, 1928년 작, 45x34, 정지석 소장
*화가 정현웅(鄭玄雄)은 1935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면서 신문 삽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1930-40년대 대표적인 삽화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신문과 잡지에 다양한 평론을 게재하며 뚜렷한 예술관을 드러내 문예계와 미술계를 넘나드는 활약을 하였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시 월북하여 북한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사업을 주도하였고 삽화를 위시한 출판 미술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 글은 정현웅 화백(1910-1976)의 둘째 아들인 정지석씨의 자료도움을 받아 이어 쓴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1927년 조선미전에 처음 입선한 <고성>을 비롯해서 풍경화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이미 1928년에 동생을 모델로 앉혀놓고 인물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이 후에 사실주의적 인물화로 굳혀지게 되는 시초가 바로 이 작품으로 보인다.
“해부학적 근거를 무시한 단순하고 대담한 얼굴의 묘사라든가 입체감이 결여된 옷의 평면화된 표현, 강한 명암이 대조로 표현된 옷의 주름과 거친 필선이 세잔느의 <앙브르의 초상(Portrait of Ambroise Vollard)>과 비교해 볼 만 하다. 이 작품은 형태의 간결함과 단순성으로 화면에 안정감을 부여하며 차분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이끌어내었다.
남색 저고리에 하얀 동정, 전체적으로 짙고 어두운 색조로 침착하게 가라앉은 화면에 빨간 옷고름은 보색 대비의 포인트가 되고 있다. 저고리에 사용된 짙은 남색은 그가 남긴 잡지의 표지화에서도 종종 눈에 띄어서 그가 이와 같은 계열의 색채를 많이 사용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미술사학자 최리선)
남한에 남아있는 6.25이전의 작품으로는 유일하다.
20세 되던 1931년 제10회 조선미전에서 처음 특선한 작품 <기대앉은 여인(빙좌,?座)>
이제까지의 진보적인 화풍에서 벗어나 사실주의적 인상주의 화풍의 인물화를 제작한 것을 주목할만하다. 윤희순(尹熙順)은 <기대앉은 여인>을 두고 “곱게 무겁게 성공한 그림이다”라고 평하였는데(「제10회 조선평전」 <동아일보> 1931.6.5) 여인의 건실한 묘사와 형태의 안정성, 빛의 효과를 적절히 살린 자연스런 음영의 표현 등이 잘 어우러져 완성도 높은 화면을 구성하였다. (최리선)
1932년 제11회 조선미전에 무 감사(無鑑査)로 세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인 <단발머리 소녀>
자신의 조카 (정명선 두째 누님의 큰딸 서재정)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귀엽고 천진스런 포즈로 잘 포착한 점이 주목된다. 이후에 출품된 인물화의 모델이 전부 가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초기에 주로 풍경화를 그렸던 것에 비해 1930년대 들어서면서 인물화를 위주로 제작하게 되었으며, 진보적인 서양화풍을 다양하게 실험하던 데에서 벗어나 점차로 사실주의적인 인물화로 굳어진다.
1934년 10월 『신동아』에 쓴 「미술의 가을」에서 현대회화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으로 흐르고, 사회적으로 무관심하며 무책임해지는 것을 지적하였다. 또한 미술이 일반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을 경계하며 민중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미술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경향은 후에 삽화나 표지화 같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출판미술과 아동화, 역사화에 그가 왜 그토록 정열을 기울였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며 사실주의적 인물화를 통해 볼 수 있는 그의 견고한 데셍력과 표현력이 뒷받침되지 못했다면 수많은 삽화, 표지화, 아동화, 역사화가 대중들에게 사랑 받지 못했을 것이다.
1932년 제11회 조선미전에 무 감사(無鑑査)로 전시된 세 작품 중 하나 <꿩>
죽어가며 발버둥질치는 꿩을 그리면서 점점 일제로부터 말살 당하는 조선의 민족혼을 생각하며 그렸으리라.
1932년 제11회 조선미전에 무 감사 無鑑査로 전시된 세 작품 중의 하나. <(殘照)> 전년도 특선작가 자연 입선작
1933년 제12회 조선미전에 입선한 작품 <봄(蕩春)>
넓게 펼쳐진 평원 위에 꽃이 만개한 나무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나혜석(羅惠錫)은 1933년 5.21자 <매일신보> 「미전인상기」에서 ‘꽃 빛이 퍽 농후하다’고 기록했는데 그 색채를 확인할 길이 없어 안타깝다. 목가적이고 소박한 시골풍경을 평면적으로 펼쳐놓은 듯한 이 작품은 반 고흐(Van Gogh)의<하얀 과수원(White orchard)>을 연상시킨다.(최리선)
1935년 제 14회 조선미전에 입선한 작품 <다리(橋)>
구름다리와 물에 비친 구름다리의 그림자가 만드는 원형의 창을 통해 바깥 세상을 내다보는 듯한 재미있는 구도이다.
1935년 제14회 조선미전에서 두 번째로 특선을 차지한 작품 <좌상(座像)>
역시 사실주의 계열의 인물화로서 자신의 막내여동생 정명은을 모델로 하여 그렸다.
단순한 배경의 처리와 소박한 토속적인 여인의 얼굴은 정현웅의 인물화의 특징이다. 선의 사용에도 힘이 생겨 더욱 견고한 인물의 느낌을 주는데, 특히 치마주름을 표현하는 굵은 선은 그가 아직 후기인상파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1935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면서 삽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당시 직업삽화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여러 개의 삽화를 그려야 했다. 이러한 과정은 그에게 중요한 뎃셍 연습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즈음의 작품들에서는 묘사력이 크게 향상되어 필치가 안정되어감을 느낄 수가 있다.(최리선)
1936년 제15회 조선미전에 무감사(無鑑査)로 전시된 작품 <춘자(春姿)>,
1935년 특선한 작품 <좌상>과 자세만 바꾼 것 같은 유사한 작품으로 역시 막내여동생 정명은을 모델로 하여 그린 인물화이다.
인물표현에 있어서 원숙함이 느껴지는 이 작품을 두고 윤희순(尹熙順)은 1936년 5월 27일 <매일신보> 「미전의 인상」에서 “청초한 배색과 세련된 자세 등이 씨의 뇌두(腦頭)의 총명함을 말한다”고 평하였다. (최리선)
모델인 4살 아래(1914년)의 여동생 정명은은 83세에(1997년) 암으로 작고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여조카들이 문병 차 들렀다. 병문안을 드리니 단아하게 앉으셔서 “내가 암에 걸렸다는구나.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하시기에 “무슨 말씀이신가요?” 의아해서 여쭈어보니 “젊은 사람도 암에 걸려 일찍 세상을 하직하는데 나는 살만큼 살아서 암에 걸렸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하시던 말씀을 충격으로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조카 서재량)
평생 종교를 갖지도 않으셨으나 죽음도 감사하게 수용하는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욕심도 없이, 조용조용히 사셨고, 기품이 있으되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비단결 같이 착한 심성을 지니고 한평생을 사신 분이다.
형제 2남 4녀가 모두 한결같이 이런 심성의 소유자들이다.
◐'미스터 백석' 옆자리에서 정현웅이 그린 이 그림을 보시오 [TOP]
정현웅 화백(1910-1976)이 그린 <백석의 프로필>, <<문장>>, 1939. 여름 특집호에서 백석(白石)의 프로필
이것은 청년시인이고
잡지 여성 편집자
미스터 백석(1912-1963)의
프로필이다.
미스터 백석은 바루
내 오른쪽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오리기도 하고
와리쓰게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밤낮
미스터 백석의 심각한 프로필만 보게 된다.
미스터 백석의 프로필은 조상(彫像)같이 아름답다.
미스터 백석은 서반아(스페인) 사람도 같고 필립핀(Philippine) 사람도 같다.
미스터 백석은 필립핀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미스터 백석에게 서반아 투우사의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백석의 프로필>, <<문장>>, 1939. 여름 특집호
화백이 이렇게 글과 그림으로 시인을 내보여주었으니 한번 어떻소?
1939년이라는 화백의 해가 밝았소. 이 해가 뜻깊지 않을 수 없던 것이 10월 14일 이 서른 살 노총각이 이화여자전문학교서 피아노를 전공한 처녀 남궁요안나와 사귄 지 3년 만에 결혼한 까닭이오. 아니 다들 하는 결혼에다 몇 번이라도 하는 흔한 결혼이 뭐 그리 대수겠냐만...
이것은 부인 남궁요안나가 하마터면 그져 옛 신문과 잡지의 글과 그림으로 감춰져 있었을지 모를 현대미술가의 거장 화가 정현웅(1910-1976)을 찾고 또 찾아내어 다시 살려냈기 때문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남궁요안나가 없으면 정현웅도 없는 것이오. 아 그 처녀는 지금도 곱디 곱게 살아계시오. 얼마도 안된 정현웅화백 추모사업회 기념식에 갔다가 내 눈으로 뵈었소. 정현웅은 그렇게 본인에게도 살아 돌아온 것이오.
다른 얘기 같소만 1939년하면 울 어무니 정효님 여사가 전라남도 노안에서 토끼띠로 태어나셨지. 그로부터 또 정확히 30년 닭띠 해. 나 본인 이근삼이 세째인 막내로 태어났질 않았것소. 이걸로 상관없이 먼 북한서 쓸쓸한 생을 마감하신 저 정현웅 화백과 억지인연을 지어내려는 것이 아니오.
사실이 이렇소. 본인이 합정역 엠바오라는 아프리카 분위기나는 카페에서 '백석과 노홀자'라고 여섯 차례 강좌를 열어제꼈는데 거기 십년지기 백석연구가 김달진(김준섭)을 꼬셔 세웠다오. 다락방 같은 회합실서 모인 여러 남녀들이 허연 막걸리에 파전을 갖다 놓고 취중강의를 들었소이다. 어디 가당키라도 했겄소. 우린 금방 합석한 걷기여행가 김기홍 군의 말에 '우리 모두 다같은 백석 고향친구들'이 되기로 결심했다오. 그후 그는 내 걷기스승이오. 아! 모진 고문에 청각장애를 그리 심하진 않으나 겪고 있는 천재작가 이종수와 시를 쓰는 천희씨도 만났고 미려라는 아리따운 목소리 노처녀도 사귀었소이다.
아 아 본인이 하려는 말이 이것이 다가 아니고. 이 '노홀자' 판이 회를 거듭하다가 이 희미한 소식을 어찌들은 정현웅 화백의 둘째 아들(한미약품 고문)이 나타났단 말이오. 장남이 나와 동갑인 아부지뻘 되는 어른을 차라리 술김엔지는 모르겠으나 나이를 무시한 진짜 '고향친구' 기분이 들더라 이말이오. 친구같은 대화체를 그대들은 한번이라도 느껴본 적이 있소?
이것이 백석수행원장 김달진을 따르는 백석수행원 무리들이 깜짝놀라며 '그토록 추앙한' 백석과 절친인, 정현웅 화백의 실핏줄을 눈으로 확인해보는 순간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내 말이오.
그러니 신문사 사무실의 백석 바로 옆자리에 앉아 쳐다보고 또 쳐다보다가 저렇게 그린 '미스터 백석'이나, 그에 미쳐있는 본인의 십년지기 백석연구가 김달진(김준섭)이나, 지금 그런 사연으로 이렇게 정현웅 화백을 연재한답시고 쓰고 있는 본인과, 나와 동갑나이 아들을 둔 정현웅 화백의 둘째 아들 정지석 사이에 이런 기막힌 끈줄이 또 어디 있나 이 말이오.
◐정현웅 화백과 백석을 소리내 읽는 문학의 밤 [TOP]
묵독[默讀, silent reading]을 음독[音讀, oral reading]으로 겨룬다. 대영토 정벌에 나선 알렉산더 대왕이 어머니께 온 안부편지를 소리없이 읽자 신하들이 크게 당황하며 하마터라면 왕에게 화를 낼 뻔했단다.
조선 선비들은 눈으로 읽지 않고 소리내어 읽었다는 건 다 아는 사실. 서당 훈장님 앞에서도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말이다. 18세기 조선엔 책 읽어주는 이야기꾼 '전기수'라는 직업까지 있었다니 그 때는 음독의 시대, 낭독의 시대였다.
정현웅 화백과 백석 시를 소리내어 읽는 문학의 밤이 12월 15일(목) 저녁 7시30분에 정현웅 화백이 태어난 궁정동 부근에서 열린다. 3호선 경복궁역 1번출구에서 100미터 못가 사직공원 바로 직전 첫번째 오른 쪽 큰 찻길 두갈래 모퉁이 길 건너 안쪽 초입에 있는 동물사랑실천협회(서울시 종로구 필운동, 전화 02-313-8886) 사랑방.
글이 눈에 들어오고 뇌에 전해져 다시 혀와 목청을 통해 소리로 태어나면 이는 마치 글을 꼭꼭 씹어 먹는 기분이 들 것이다. 또한 정현웅 화백과 백석이 함께 자리한 듯 실감난다. 북방(北方)에서 - 정현웅(鄭玄雄)에게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肅愼)을 발해(渤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익갈나무의 슬퍼하던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들던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맷돌을 잡어 나를 잔치에 보내던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던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 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야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는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백석, 1940년 7월 『문장』지 18호에 발표
백석이 쓴 시 중 부제가 붙고 그 부제가 한 인간을 향해 헌사된 경우는, 제목 자체가 ‘허준’인 시를 제외하면 이 시 한 편뿐이다.
백석이 만주와 북관 등지를 떠돌며 현실적으로 가장 남루하고 초라했을 때, 그가 불러본 사람도 허준과 정현웅이었다. 조상도 형제도 일가친척도 정다운 이웃도, 그리운 것과 사랑하는 것, 우러르는 것, 모두가 다 사라지고,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고 없을 때, 그가 문득 떠올린 친구가 바로 정현웅이었다.
아마 백석은 이 시를 쓰면서 고향을 떠나온 자신의 처지를 되새기고는 정현웅을 목메어 불렀을 것이다.
백석은 함흥 영생고보 교사생활을 잠시하다가 1938년 <조선일보>사에 재입사하여 『여성』지 편집을 맡아 일했다. 그 곳에서 정현웅을 만나 직장동료이자 친우로서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백석이 경기도 뚝섬에 새집을 지어 먼저 뚝섬으로 이사를 가고 난 뒤 혼자 살기 심심하다고 뚝섬에 와서 함께 살자고 조르는 바람에 정현웅도 이사를 와서 바로 옆집에 나란히 함께 살았다.
정현웅은 1941년 7월 『문장』지에 백석의 초상과 함께 다음과 같은 장난끼어린 글을 실었다.
정현웅 화백(1910-1976)이 그린 <백석의 프로필>, <<문장>>, 1939. 여름 특집호에서
이것은 청년시인이고
잡지 『여성』 편집자 미스터 백석의 프로필이다.
미스터 백석은 바로 내 오른쪽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오리기도하고 와리쓰게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밤낮
미스터 백석의 심각한 프로필만 보게 된다.
미스터 백석의 프로필은 ?像과 같이 아름답다.
미스터 백석은 서반아 사람도 같고 필리핀사람도 같다.
미스터 백석은 필리핀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미스터 백석에게
서반아 투우사의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거이라고 생각한다.
以下 略……
백석은 1940년 정현웅과 허준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 가서 시 백 편을 가지고 오리라” 다짐하고 고향인 이북 定州로 떠났다.
헤어진 두 사람은 다시 북한에서 만났고 한동안 글과 그림을 서로 맡는 창작활동을 함께 했다. 1957년에 북한에서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출간할 때 정현웅이 표지화와 삽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보라. 또한 이 책의 뒷장에는 ‘저자의 초상’이라는 표제가 붙은 정현웅이 스케치한 중년이 된 백석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누구 키가 더 큰가 [TOP]
1963년작, 평양조선미술박물관 소장.
누구 키가 더 큰가
어디 한번 대보자
올라서면 안 된다
발을 들면 안된다
똑같구나 똑같애
내일 다시 대보자
- 윤석중 작, <키대보기>
정현웅 화백은 1948년 아동문학가 윤석중의 동시집 <굴렁쇠>에 수록된 '키대보기'라는 동심들의 풍경을 삽화로 그렸는데 훗날 월북 후에 털실의 질감이 생생한 수채화 '키대보기'로 재탄생시켰다.
이후 2002년 남북문화축전 때 북측에서 가지고 와 남한에 전시했는데 이를 본 윤석중씨는 '예술의 환생'이라고 놀라며 반가워했다.
정현웅이 <조광> 1940년 8월호에 그린 삽화 '뚝섬 제방'. 백석과 허준이 떠난 조선일보와 조광사에서 남아 <여성>지와 <조광>지의 살림을 도맡다시피한 정현웅의 동 제목의 수필은 이렇게 끝난다 : "몸에 젖인 땀내와 더위를 강바람에 흐뜨려버리면서 작자 미상의 태서명화(큰 화폭에 그린 서양 명화 ㅡ 편자 주)와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저녁이면 가끔 제방 위를 혼자서 걷는다. 포플라가 보는 곳이 유원지다."
정현웅이 <조광> 1940년 8월호에 그린 삽화 '뚝섬 제방'. 백석과 허준이 떠난 조선일보와 조광사에서 남아 <여성>지와 <조광>지의 살림을 도맡아한 정현웅의 동 제목의 수필은 이렇게 끝난다 : "몸에 젖인 땀내와 더위를 강바람에 흐뜨려버리면서 작자 미상의 태서명화(큰 화폭에 그린 서양 명화 ㅡ 편자 주)와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저녁이면 가끔 제방 위를 혼자서 걷는다. 포플라가 보는 곳이 유원지다."
잠들기 내기
둘째 아들 정지석님을 백석연구가 김달진씨와 만났습니다. 아버지 정현웅은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고 년년생인 형(오른 쪽)과 자기(왼쪽)를 모델로 그렸다 합니다. 1948년 윤석중 동화집에 실림. 뽀로로가 유아들의 대통령인 것처럼 유아와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친숙한 질감과 정감이 느껴진다.
◐기타 [TOP]
"순수회화와 삽화가 다른 것은 그림으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위전(위치)에 있다. 삽화는 말하자면 쓰레기 속의 미술이요, 처음부터 미술인 체 내세우는 미술이 아니다. 벽에 걸 것을 목적하고 그리는 것도 아니고, 병풍을 목적하고 그리는 것도 아니다. 아침에 신문 위에 실렸는가 하면, 저녁에는 거리에 굴러다니면서 행인의 발밑에 짓밟히거나, 반찬거리를 사러가는 아이의 싸게지가 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은, 항상 움직이고 있는 세상의 활발한 현역품으로서의 역할을 가진 곳에 그 가치가 있고 흥미가 있다. (...)
여하간 삽화를 그리게 된 것이 우연였는지 모르나, 너무나 순조롭지 못했던 과거의 수업의 생활을 생각하면, 당연히 들어서야 할 길이 있는 것 같고, 설사 삽화를 그린다는 것이 문화적인 역할로서 그다지 대수롭지 못한 일이라손치더라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 간절한 욕망과 열정을 이러한 것에나마 터뜨려버릴 곳을 구하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짝에도 쓰잘데없는 내 자신을 어디다 어떻게 처리하였으면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 다만 이곳의 삽화가의 초라한 위치가 짝 없이 우울하다."
- 정현웅, <삽화기>에서, '인문평론' 6호(1940.3)
